[동아일보]
1868년 3월 14일 16세의 어린 일왕(日王)은 또박또박 ‘5개조 서문’을 읽어 내려갔다. 그동안 ‘허수아비 왕’에 불과했던 국왕에게 모든 실권이 집중된다는 내용이었다. 일본 근대국가 수립의 불을 댕긴 메이지(明治)유신의 개막이었다.
메이지 국왕은 수도를 교토(京都)에서 도쿄(東京)로 옮겼다. 왕이 대대로 살아온 교토를 버리고 도쿠가와(德川) 정권의 심장부인 도쿄에 ‘입성’한 것은 봉건적 무사정치의 종말을 의미했다.
700년 동안 계속돼 온 사무라이 정치의 몰락은 덧없었다. 1859년 미국의 개항 압력에 부닥친 무사정권은 우왕좌왕하며 지도력 부재를 드러냈다. 이 틈을 타고 부상한 존왕파(尊王派) 세력은 국왕 중심적 지배체제를 확립해 서양과 교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0여 년에 걸친 존왕파와 무사정권의 대립은 서양의 지지를 등에 업은 존왕파의 승리로 끝났다.
수백 년간 계속된 지방분권적 봉건질서가 일거에 무너지고 불과 10년 만에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가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당시 일본에는 조선의 유생처럼 사회적 변화에 저항하는 여론주도층이 거의 발달하지 못했다. 도쿠가와 정권 시절 축적한 경제적 부(富)가 메이지유신의 재정적 발판을 마련해준 점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봉건적 군사통치를 타파하고 메이지유신을 이뤄낸 중추세력 역시 무사계급이었다는 점이다. 메이지유신은 무능력한 무사 지도부에 반발하는 하층 무사들이 국왕을 내세워 ‘위로부터의 개혁’을 밀고 나가는 과정이었다.
개혁 주체세력의 군사적 성격은 ‘양날의 칼’로 작용했다. 신진 무사그룹은 일사불란한 정책수행으로 개혁 일정을 앞당겼지만, 다른 나라는 일본 근대화의 희생물이 될 수밖에 없다는 국수적·제국적 세계관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메이지유신의 양면성은 한국의 대일(對日) 인식의 근저에 뿌리 깊게 박혀 있다. 한국은 일본에 대해 ‘일찍이 서구 근대문명을 수용한 경제대국’이라는 시각과 ‘식민침탈의 부도덕한 나라’라는 시각 사이를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인식의 골은 메워지기는커녕 극단을 향해 치닫고 있다.
일본의 과거사 반성 노력과 함께 우리 내부에 존재하는 대일 인식의 간극을 좁히는 작업도 중요하다. 발전적인 한일관계를 위해선 두 나라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