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고전이야기

[스크랩] 고중세사 교재 요약 (11~15장)

쫄개 2008. 1. 7. 07:20
 

제11장 원정과 중세의 개막

시대 개관

헤이안시대 후기 약 100년간의 정치의 특징은, 종전까지의 섭관정치와 달리 천황의 아버지인 상황(上皇)이 실권을 장악하는 원정(院政)이 시작된 점에 있다. 섭관정치는 천황의 외가인 후지와라씨의 유력자가 섭정 또는 관백의 자격으로 정치실권을 장악하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원정이 시작되자 천황의 외가에서 친가로 권력이 이동하였다.

무력행사를 특기로 하는 무사가 사회의 표면에 나타나 큰 역할을 행하게 된 것을 이 시대에 일어났던 큰 변화 중의 하나로 들 수 있다. '전구년.후삼년의 역' 등 지방사회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던 무사의 활동은, 이윽고 수도인 교토로 파급되어 원이나 천황, 후지와라씨 섭관 가문의 내부 대립과 분쟁도 무사의 무력에 의해 결착을 보게 된다. 바로 '호겐.헤이지의 난'이 그것이다.

그 결과,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淸盛)를 리더로 하는 헤이씨 일문이, 조정에서 세력을 떨쳐 무사집단으로서는 처음으로 권력을 장악하였다. 헤이씨는 기나이(畿內).사이고쿠(西國) 지방의 무사단을 조직해, 세토 내해(瀨戶內海).북규슈(北九州)에서 중국으로 이어지는 해상교통의 루트를 지배, 일.송무역을 발전시킨 점에 특색이 있었다. 무사가 정치의 표면에 등장했을 뿐 아니라 국제관계에 있어서도 새로운 장을 열었던 것이다.

11.1 원정과 천황

후지와라(藤原)씨가 천황의 외척으로서 섭정과 관백이 되어 실제 정치를 맡아 보았던 섭관정치(攝關政治)를 종식시키고, 천황 집단이 정치권력을 되찾고자 노력하였던 것이 바로 고산조(後三條) 천황이다.

11.1.1 섭관정치의 종식

후지와라씨와 외척관계가 없는 고산조 천황이 즉위함으로써 섭관정치는 마침내 그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섭관 집안을 외척으로 하지 않는 고산조 천황이 즉위하게 되는데, 이처럼 후지와라씨와 외척관계가 없는 천황이 출현하게 된 것은 실로 171년 만이었다.
고산조는 천황 중심의 정치를 끈기있게 차근차근 추진해 나가면서 후지와라씨로부터 권력을 되찾아 갔다.

11.1.2 장원정리

고산조 천황은 보다 철저한 장원정리령을 발표하고, 장원 정리를 추진하는 관청으로서 기록장원권계소(記錄莊園券契所)를 설치하였다.

11.1.3 고산조 천황의 정치

이러한 고산조의 즉위로 인해 섭관정치의 전성기는 마침내 그 막을 내리고 말았다. 고산조는 퇴위하기 전에 다음에 즉위할 천황과 세자도 자신이 결정하였다.

11.1.4 원정의 시작

고산조 천황의 뒤를 이어 즉위한 사람이 아들인 시라카와(白河) 천황이었다. 시라카와는 자기 아들을 황태자로 삼은 그 날에 바로 천황에 즉위시키고 자신은 상황이 되었다. 이리하여 1086년에 시라카와 상황에 의한 원정(院政)이 시작된 것이다. 상황(上皇)은 태상천황(太上天皇)을 줄인 말로, 퇴위한 천황을 의미한다.
이처럼 퇴위한 천황이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고 정치를 행하는 것을 원정이라고 한다. 섭관정치가 천황의 외척인 모계(母系)가 행한 정치라고 본다면, 원정은 천황의 아버지인 부계(父系)가 행한 정치라고 할 수 있다.

11.1.5 원정의 기반

섭정이나 관백은 어디까지나 천황을 대신하여 정치를 하는 것이므로, 천황이 없으면 그 권력의 근원은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원정의 경우에 상황은 천황 집안의 장로(長老)로서 상황 자신한테 권력의 근원이 있다.

11.1.6 북면의 기사

한편, 상황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지방의 무사들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시라카와 상황은 원의 북쪽에 무사들의 집합장소를 두었는데, 이에 유래되어 '북면(北面)의 무사'라고 불리게 되었다.
시라카와 상황의 원정은 43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그 사이에 호리카와(堀河).도바(鳥羽).스토쿠(崇德)의 세 천황이 바뀌었다. 원정은 그 후에도 지속되었지만, 가마쿠라시대 이후 무사의 힘이 강해져서 원정은 점차 그 세력을 상실해 갔다.

11.2 원정과 불교

11.2.1 구마노모데

원정의 상황들은 모두 불교 신봉자였다. 대표적인 예로 시라카와 상황을 들 수 있는데, 1096년에 출가하여 법황이 되었다.그는 교토에 법승사(法勝寺).존승사(尊勝寺)와 같은 사찰을, 그리고 고시라카와(後白河) 법황은 교토에 산주산겐도(三十三間堂)를 건립하였다. 특히 상황들이 열중한 것은 구마노(熊野) 지방에 있는 신사(神社)로 참배하는 구마노모데(熊野詣)였다.
이러한 상황들의 불교 신봉은 원정기에 들어와 사원세력이 더욱 커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사원세력은 조정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곧잘 교토로 몰려와 시위를 하였다. 특히 유명한 것이 히에이산(比叡山) 엔랴쿠지(延曆寺)와 나라(奈良) 고후쿠지(興福寺)의 승병들이었다. 이들의 횡포에는 당시의 전제군주인 상황도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당시 전제군주였던 시라카와 상황은 자신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3가지 있다고 실토했는데, 그것은 가모가와(賀茂川)의 범람과 도박의 유행 그리고 산법사(山法寺)들이었다고 한다.

11.2.2 남도북령

일본 중세사회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를 들 때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바로 승도 집단의 무장시위를 통한 실력행사라 할 수 있다. 헤이안시대 후기, 정권을 장악한 귀족층이나 신흥 무사세력과 더불어 큰 세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 남도북령(南都北嶺)이다. 이는 남도 즉 나라의 고후쿠지(興福寺)와 북령 즉 교토 북쪽의 히에이산에 위치한 엔랴쿠지로 대표되는 사사(寺社)세력을 일컫는 말이다. 그들은 무사세력의 발전과 보조를 맞추어 무력을 갖추고, 실력으로써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켜 갔다.
헤이안시대 후기에 들어와 이러한 승병들의 시위가 빈발하게 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원(院)이 이용한 것이 바로 무사단을 이끌고 있던 세이와 겐지(淸和源氏)나 간무 헤이시(桓武平氏)들이었다.

11.3 호겐.헤이지의 난

12세기 중엽, 천황가.섭관가 각각의 내부에서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도바 법황과 고시라카와 천황과 스토쿠 상황 사이의 갈등이, 섭관가의 관백 후지와라노 다다미치(藤原忠通)와 동생 후지와라노 요리나가(藤原賴長)와의 대립과 겹쳐, 1156년(保元 元年)에 도바 법황의 사망을 계기로 하여 마침내 교토에서 전투가 일어난다.
그 결과 고시라카와 천황측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는데, 이를 '호겐(保元)의 난'이라고 한다. 현재 일본 학계에서는 이 호겐의 난을 고대가 종식되고 중세가 시작된 시점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호겐의 난 이후, 겐지 무사단의 수장인 미나모토노 요시모토와 헤이시 무사단의 수장인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대립이 표면화된다. 그 결과, 1159년(平治 元年) 미나모토노 요시모토는 고시라카와 상황의 근신인 후지와라노 노부요리(藤原信賴)와 결합하여 궁궐을 점령하였으나 다이라노 기요모리에 의해 진압되고 만다.
그리고,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의 아들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는 이즈(伊豆) 지방으로 유배 당한다. 이후 겐지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는데, 이를 '헤이지(平治)의 난'이라고 한다. 이 두 차례의 난은, 기요모리가 중앙정계로 진출하게 되는 획기적인 사건이 되었다.


< 요 약>

섭관정치는 후지와라씨와 외척관계가 없는 고산조 천황이 즉위함으로써 그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고산조 천황은 '기록장원권계소'라는 기구를 중심으로 후지와라씨의 경제적 기반인 장원에 대한 정리를 시행하고, 가급적 후지와라씨와 관계 없는 자를 이 기구의 관리로 등용하였다.

고산조 천황의 뒤를 이어 즉위한 시라카와(白河) 천황은 1086년 상황으로 즉위하여 원정을 개시하였다. 시라카와 상황 이후, 원정은 약 140년 동안 실질적인 정치 역량을 갖추며 유지되었다. 한편, 원정이 시작되자 유력 공가(公家)에 기진되었던 장원이 차례로 원에 집중하게 되어, 원은 광대한 장원의 소유자가 되었다. 또, 상황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북면의 무사라는 기구를 매개로 지방의 무사들을 모으고, 각 무사단의 수장인 동량들과의 결합을 강화해 가면서 군사력의 기반으로 삼았다.

한편, 헤이안시대 후기에 들어와 남도북령을 중심으로 한 승병들의 시위가 빈발하게 되자, 원은 무사단을 이끌고 있던 세이와 겐지와 간무 헤이시 세력을 이용하게 되었으며, 1156년에는 천황가 및 섭관가 내분에 무사세력의 힘을 빌어 해결하기에 이르는데, 이를 '호겐(保元)의 난'이라 한다.

호겐의 난 이후, 겐지 무사단의 수장인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와 헤이시 무사단의 수장인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대립이 표면화되어 1159년 '헤이지(平治)의 난이 일어났으며, 여기서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미나모토노 요시모토를 진압하고 헤이시 정권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심화 학습>

1. 헤이안.가마쿠라시대 무사단의 구성.
2. 헤이안.가마쿠라시대 무사들의 전투.
당시의 전투 즉 갓센(合戰)은 대략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
당시의 갑옷은 기마전투에 적합하도록 운동의 경쾌성에 중점을 두고 제작되었다.
기마전투에서 20~30개 정도의 화살을 다 사용하면, 그때부터는 칼로 싸우게 된다.


<주요 인물 및 용어>

고산조 천황(後三條天皇:1034~1073)





제12장 가무쿠라 막부의 성립

<시대 개관>

'헤이지의 난'에서 겐지(源氏) 무사단을 제압하고 성립한 헤이시 정권은, 기요모리가 태정대신에 오르고 일족이 전체 국사직(國司職)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등, 권력이 헤이시 일족에 집중되면서 점점 전제화되어 갔다. 이러한 헤이시의 전제정치는 고시라카와 상황.귀족.대사원.지방 무사단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되고, 1180년 고시라카와 상황의 둘째 아들인 모치히토왕(以仁王)이 전국의 겐지 무사들에게 헤이시를 타도하라고 명령한 것을 계기로 하여, 이후 5년간에 걸쳐서 내란이 전개 되는 것이다.

이 내란의 최종적인 승리자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당시 무사들의 최대 관심사였던 영지(領地)에 대한 지배권을 보장해 줌으로써 무사세력의 결집에 성공하였다. 교토에서 관료제도를 장악함으로써 권력을 확대하고자 했던 헤이시와는 달리, 일본의 동부 지방인 가마쿠라(鎌倉)라고 하는 지방에 정권의 기반을 두고 이 지역의 무사들의 지지를 정권의 확실한 토대로 삼고자 하였던 요리토모는 무가 정권의 독자적인 발전의 기반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요리토모는 고시라카와 상황이 죽은 뒤에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에 임명되지만, 그가 죽은 뒤에 쇼군직을 계승한 두 아들도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되어, 겐지 쇼군(源氏將軍)은 3대에 그치게 되었다.

12.1 겐페이의 내란

12.1.1 헤이시 정권의 성립

'호겐(保元)의 난'과 '헤이지(平治)의 난'은 헤이시(平氏)가 중앙정계에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헤이지의 난 이후, 원(院)과 결탁한 헤이시의 세력은 급속하게 커져 갔다.
난이 끝나자,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淸盛)는 승진을 거듭해 마침내 1167년에는 무사 출신으로서 최초로 율령관제 중 최고의 관직인 태정대신(太政大臣)이 되었다.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일.송무역에도 주력하여, 현재의 고베(神戶) 항구에 해당하는 오와다노 도마리(大輸田の泊)를 수리해 세토 내해(瀨戶內海) 항로의 안전을 꾀하는 한편, 송나라 상인들을 그곳까지 불러왔다.
헤이시 정권은 귀족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12.1.2 겐페이 갓센

‘겐페이 갓센(源平合戰)’이란, 1180년 5월부터 1185년 3월까지 겐지(源氏) 무사단과 헤이시(平氏) 무사단 사이에 전개된 내전이다. 이 ‘겐페이 갓센’의 발생 배경과 전개는 다음과 같다.
헤이시는 권력이 커지면서 전횡을 일삼게 되었다.
헤이시 정권은 그 일족들이 관료제에 의존하는 형태로 정권을 독점하고, 귀족 정권화되어 감에 따라서 정권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무사계급의 지지를 점차 잃어 갔던 것이다.
1180년 5월, 미나모토노 요리마사(源賴政)는 고시라카와 법황의 아들 모치히토왕(以仁王)을 받들고 헤이시 타도를 위한 군대를 일으켰으나 실패에 그치고 만다.
한편, 모치히토왕의 명령에 응하는 형태로, 이즈(伊豆) 지방에서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와 같은 겐지 무사들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군대를 일으켰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도고쿠(東國) 지방 무사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세력을 확대하여, 무사의 동량(棟梁)으로서 가마쿠라에 본부를 두고 그들과 주종관계를 맺고 고케닌(御家人)으로 조직하였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군대를 일으킨 이후, 도고쿠 지방만이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헤이시에 반기를 든다는 명분 아래 무사들이 일어나 각지에서 혼란에 계속되었다.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세력을 만회할 수가 없어서 뒤를 근심하면서 세상을 떠나게 된다.

12.1.3 헤이시의 멸망

이즈 지방에서 군대를 일으킨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헤이시 무사들로 구성된 토벌대와 벌어진 처음 전투에서는 패배하였지만, 도고쿠 무사들을 규합하여 가마쿠라로 들어간다.
고시라카와 법황으로부터 헤이시 토벌을 명령받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동생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에게 진격을 명하여 1185년 3월, 마침내 헤이시 일족을 규슈 지방의 단노우라(壇の浦)에서 멸망시켰다.
헤이시가 멸망한 뒤, 고시라카와 법황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미나모토노 요시쓰네를 중용함으로써 겐지를 분열시키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나토모노 요리토모는 거꾸로 법황을 위협하여 미나모토노 요시쓰네를 체포하라는 상황의 명령을 받아내 압력을 가함으로써, 오슈 후지와라씨(奧洲藤源氏)의 보호를 받고 있던 미나모토노 요시쓰네를 살해하게 하였다.

12.2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

12.2.1 가마쿠라 막부의 기구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1180년 고케닌의 통제와 군사.경찰기능을 담당하는 사무라이도코로(侍所)를 설치하고, 와다 요시모리(和田義盛)를 그 장관에 임명하였다.
또, 1184년에는 일반정무를 관장하는 구몬조(公文所)와 영지(領地)에 관한 소송을 처리하는 몬추조(問注所)를 설치하였다.
슈고는 각 국마다 설치되었다. 막부 창설에 큰 공을 세운 유력 고케닌이 임명되었으며, 그 권한을 대범삼개조(大犯三個條)라 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오반사이소쿠(大番催促)라 하여, 자기가 관할하는 국(國)의 고케닌들을 지휘, 평상시의 봉공(奉公)으로 교토의 경비를 담당하게 하였고, 둘째 모반인(謀叛人), 셋째 살해인(殺害人)을 체포하는 등, 국내의 치안을 유지하는 일을 하였다.
지토는, 장원.국아령에 설치되어 연공을 징수해 장원영주에게 보내고, 토지를 관리하며, 치안 유지에 임하였다.

12.2.2 공가와 무가의 이원정권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1185년 조정에 기소(議奏)를 설치하여, 조정 내부에 자신의 의사가 반영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1192년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에 임명되어 가마쿠라 막부는 명실상부한 권력기구로 확립되었다.
가마쿠라 막부의 정치적.군사적 기반은 고케닌 체제에 있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고케닌들이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소령의 지배를 인정하거나 새로이 소령을 하사하는 등의 은혜를 베풀었다. 이에 대하여, 고케닌은전시의 군역(軍役)이나 평시의 교토 오반야쿠(京都大番役).가마쿠라 반야쿠(鎌倉番役)와 같은 의무를 다해야 했다.


<요 약>

‘헤이지의 난’에서 겐지를 제압한 헤이시는, 원과 섭관가를 압도하는 세력을 가지고 무사 출신으로서는 처음으로 정치의 실권을 잡았다.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태정대신에 올랐으며, 헤이시 일족은 고위관직과 20여 개의 지행국 및 500여 개의 장원을 획득하였다. 헤이시 정권은 또한 송과의 무역에도 주력하여 다자이후에 일족과 게닌을 파견하여 송나라와의 무역에 종사토록 하였다. 이러한 헤이시 권력의 전제화 경향은 고시라카와 법황이나 귀족.대사원 등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1180년 고시라카와 상황의 둘째 아들인 모치히토왕이 전국의 r겐지들에게 헤이시를 타도하라고 명령한 것을 계기로 하여, 이후 5년간에 걸쳐서 내란이 전개된다.

이즈 지방에서 유배생활을 보내고 있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도고쿠 무사의 동량으로서 헤이시 타도에 나서게 되었다. 고시라카와 법황으로부터 헤이시 토벌을 명령받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에게 진격을 명하여 1185년 헤이시 일족을 단노우라에서 멸망시켰다. 헤이시가 멸망한 후 고시라카와 법황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미나모토노 요시쓰네를 중용함으로써 겐지를 분열시키려 했으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거꾸로 법황을 위협하여 미나모토노 요시쓰네 토벌을 구실로 총추포사의 임명 및 지토의 설치를 인정받았다. 이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오슈 후지하라시를 공격해 멸망시키고, 마침내 전국의 군사지배권을 장악하였다.

미나모토씨는 가마쿠라를 본거지로 정하고 도코쿠 지방을 중심으로 무가정치를 개시했다. 그 정치조직은 사무라이도코로.만도코로.몬추조 등과 같이 무사의 통솔을 위한 실질적이고 간소한 것이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 의해 개시된 이 정권을 가마쿠라 막부라 하며, 막부가 멸망할 때까지의 140년간을 가마쿠라시대라 한다.

가마쿠라 막부는 쇼군과 무사 간의 주종관계를 토대로 성립했다. 쇼군은, 자신의 지배하에 있는 무사를 고케닌(家人)이라 하여 그들의 기존 영지를 인정하고 보호함과 동시에, 슈고나 지토로서 새로운 영지를 부여했다. 이를 고온(御恩)이라고 하는데, 그 대신에 고케닌은 쇼군에 대한 충성을 서약하고, 전투가 있으면 생명을 걸고 봉공의 의무를 다했다. 그러나, 지방의 각 국에는 여전히 조정이 국사를 임명하고 있었으며, 장원에는 귀족이나 사사의 권력이 아직 강하게 남아 있었다. 이로 인해, 전국의 정치는 크게 조정과 막부의 이원체제하에 이루어지게 되었다.

<심화 학습>

1. 오슈 후지와라시(奧州藤原氏)의 멸망과정
2. 헤이시 정권과 막부의 차이점
전체적으로, 헤이시 정권은 관료제에 의거한 귀족적 성격을 띠고 있었던 데 반해, 가마쿠라 막부는 교토의 조정과는 확실한 선을 긋고 도고쿠 지방이라는 지역에 기반을 둔 무사들의 정권을 추구한 것이 중요한 차이라 할 수 있다.
3. 슈고(守護) 및 지토(地頭) 설치의 역사적 의의
슈고와 지토를 설치함으로써 전국적으로 그 지배력을 확대시켜 나갈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4. 막부와 조정의 관계
막부의 직접적인 지배력이 미치는 범위는‘간토 고세이바이치(關東御成敗地)’라고 불리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소유의 장원과 지행국, 슈고 및 지토직에 한정되어 있었으나, 슈고와 지토를 설치해 전국의 군사.경찰권을 장악하게 되자, 전국은 조정과 막부의 이원적인 지배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주요 인물 및 용어>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淸盛; 1118~1181),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 1147~1199), 미나모토노 요시쓰네(源義經; 1159~1189), 지행국(知行國), 게닌(家人).




제13장 조큐의 난과 싯켄정치

<시대 개관>

가마쿠라 막부를 세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사망한 뒤, 유력한 무사들 사이에는 막부의 주도권 장악을 둘러싼 투쟁이 계속되어 많은 유력한 무사들이 몰락하였다. 그리고 겐지 쇼군의 적통을 계승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두 아들도 암살당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세력을 증대시켜 온 것이 바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처가인 호조씨(北條氏) 일족인데, 이들은 싯켄(執權)으로서 막부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막부의 내분을 알게 된 교토의 고토바(後鳥羽) 상황은, 서쪽 지방의 무사와 대사원의 승병, 호조씨의 세력 강화에 반발하고 있던 동부 일본의 일부 무사들을 동원하여 막부를 타도하고자 꾀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동부 일본의 무사세력들의 결집에 성공한 막부군에 대패하게 되고, 3명의 상황들은 외딴 섬으로 유배당하고 천황은 쫓겨나는 참담한 결과로 끝나고 말았으니, 이것이 곧 ‘조큐(承久)의 난’이다.

난이 평정된 다음에, 막부는 교토에 ‘로구하라탄다이(六波羅探題)’를 설치하여 조정을 감시하고 서일본의 무사들을 통제하게 된다. 그리고, 조정편에 가담한 귀족과 무사들의 영지 3천여 개소를 몰수해 새로이 지토를 설치하였다. 이렇게 하여 서부 일본에서도 막부의 세력이 퍼지게 된 것이다. 이후 막부 정치는 호조씨의 주도하에 발전하게 된다.

13.1 호조씨와 싯켄

13.1.1 호조씨의 대두

이즈(伊豆) 지방의 호족이었던 호조씨(北條氏)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와 협력하여 점차 세력을 확대해 갔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죽은 뒤, 장남 미나모토노 요리이에(源賴家)가 쇼군이되었는데, 그가 유력한 고케닌들의 신망을 상실하자, 그의 어머니 호조 마사코(北條政子)는 자기의 아버지 호조 도키마사(北條時政)와 함께 미나모토노 요리이에의 독재에 제동을 걸고, 중신들의 합의에 의한 정치를 행하게 하였다. 이어서, 호조 도키마사는 스스로 싯켄(執權)이라 칭하며 만도코로(政所)의 장관이 되었다.
또, 호조 도키마사의 아들 호조 요시토키(北條義時)는 사무라이도코로(侍所)의 장관으로 강력한 세력을 지니고 있던 와다씨(和田氏)를 멸망시킨 뒤, 사무라이도코로의 장관을 겸하여 막부 내의 지위를 확고히 다졌다. 그리고, 호조씨는 대대로 만도코로와 사무라이도코로의 두 기관의 장관을 겸하여 그 지위는 정식으로 '싯켄'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 무렵 막부정치의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바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처인 호조 마사코였다.

13.1.2 조큐의 난

교토에 있으면서 막부를 타도하고자 하였던 고토바(後鳥羽) 상황은 막부 내부에서 연이어 내분이 발생하자 이를 막부가 쇠퇴한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1221년에 고토바 상황은 호조 요시토키를 토벌하라는 명령을 전국의 무사들에게 내렸으나 이에 응한 무사는 얼마 되지 않고, 거의 모든 고케닌들은 막부에 충성을 맹세하였다. 호조 요시토키는 동생과 아들로 하여금 대병력을 지휘하여 상경케 하였는데, 그 결과 상황이 군대를 일으킨 지 1개월 만에 난이 평정되고 말았다. 이를 '조큐(承久)의 난'이라고 한다.
난이 평정된 뒤에도 호조씨 일족을 교토에 상주시켜, 교토 슈고(京都守護)에 대신해 교토의 경비와 조정의 감시 그리고 오와리(尾張: 뒤에 미카와三河)의 서쪽에 위치한 지방의 고케닌을 통솔케 하였다. 이 기구를 ‘로쿠하라탄다이(六波羅探題)’라고 하였는데, 대대로 호조씨 일족이 그 책임자에 임명되었다.
막부는 1223년, 전국에 명령하여 각 국마다 경작지의 면적, 국아령과 장원의 구별, 장원영주와 지토의 성명 등을 기재한 오타부미(大田文)를 작성하게 하였다. 이는 지토의 임명이나 고케닌에 대한 군역(軍役), 또 ‘교토 오반야쿠(京都大番役)’, ‘가마쿠라 반야쿠(鎌倉番役)’를 부과할 때 주요한 자료로 사용하였다.

13.1.3 싯켄정치

호조 요시토키가 죽은 뒤, 싯켄이 된 아들 호조 야스토키(北條泰時)는 싯켄을 보좌하는 렌쇼(連署)라는 직책을 새로 설치하였다. 또, 도고쿠 지방의 유력 고케닌은 물론, 법을 잘 아는 정무 담당자를 참가시켜 모두 11명의 효조슈(評定衆)를 구성, 합의(合議)에 입각해 정무와 재판에 임하게 하였다.
이어서 1232년에는 막부의 기본법전으로 51개조의 ‘고세이바이 시키모쿠(御成敗式目)’를 제정하였다. 이 법전의 내용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이래의 선례(先例)와 무가(武家)사회의 관습을 토대로 하여 주로 슈고.지토의 권한이나 고케닌의 신분과 규율, 그리고 소령에 관한 것이었다. 이 법전은 일본 최초의 무가법(武家法)으로 막부 권력이 확대됨에 따라서 전국으로 그 적용 범위가 확대되어 갔다. ‘고세이바이 시키모쿠’에 이어서 무로마치 막부의 법령인 ‘겐무 시키모쿠(建武式目)’나 전국시대 센고쿠 다이묘들이 제정한 ‘분국법(分國法)’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호조 야스토키의 손자인 호조 도키요리(北條時賴)는, 1249년에는 히키쓰케슈(引付衆)를 두어, 고케닌들의 소령에 관한 소송을 전문적으로 담당케 해 재판의 공정성과 신속성을 꾀하게 하였다.

13.2 지토와 장원

13.2.1 지토의 장원 침략

가마쿠라시대의 무사들의 대부분은 장원이나 국아령의 농춘에 거주하면서 지토나 장관(莊官)직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집 주위에 호를 파거나 흙으로 벽을 쌓았고, 초소를 설치하여 비상시에 대비하였다. 무사의 일족은 조상 대대로 전래되어 온 소령을 지키고 일족을 통솔하기 위하여, 종가의 적자를 소료(?*領)로 섬기고 일족은 그의 통제에 따랐다.
소령은 분할 상속되어져 여자에게도 상속되었다.
한편, 헤이안시대의 장원에 비하여 가마쿠라시대의 장원은 토지 지배의 면에서 크게 변화했다. 그것은 장원 속에 장원영주가 임명한 장관 외에 막부가 임명한 지토가 설치되어 이른바 이원적인 지배구조를 지니게 된 것이다. 지토는 막부의 권위를 배경으로 장원영주인 공가(公家).사사(寺社)에 반항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수확 중의 일부를 연공으로 징수하는 지토는, 모은 연공을 교토나 나라(奈良)에 사는 장원영주에게 보내야 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었으나, 횡령하는 일이 늘어 갔다.
지토에 임명된 일부 고케닌 중에는, 장원영주와 대립하여 연공을 바치지 않고 토지를 빼앗거나 농민들을 게닌(家人)으로 삼거나 하여 세력을 확대해 가는 자도 있었다.

13.2.2 지토와 농민

일본에는 “우는 아이와 지토는 당해낼 수 없다”라고 하는 속담이 있다. 그만큼 백성들에게 지토는 두려운 존재였던 것이다.

13.2.3 장원제 사회

장원에는 혼조(本所).료케(領家).아즈카리도코로(預所).지토라고 하는 다양한 직명(職名)이 있어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13.2.4 저항하는 백성

장원의 역사는,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경작지를 확보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이기도 하였다.


<요 약>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사후 막부의 실권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처인 호조 마사코와 장인인 호조 도키마사가 장악하였다. 호조씨는 유력 고케닌과 손을 잡고 쇼군의 힘을 빼앗음과 동시에 싯켄이라는 지위에 앉아 이를 독점하였다. 한편, 교토에서는 고토바 상황이 원정을 행하며 조정의 세력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쇼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가 살해되고 겐지의 쇼군이 3대에서 끊기자, 고토바 상황은 1221년 싯켄 호조 요시토키를 토벌하라는 명령을 전국에 내렸다. 그러나 고토바 상황은 막부군에 패배하고 오키에 유배되었다. 이를 ‘조큐의 난’이라 한다. 이후 막부는 교토에 로쿠하라탄다이를 설치하여 조정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였다. 또, 상황측에 가담했던 귀족 및 무사의 영지를 몰수하여 이를 고케닌에 나누어 주고 막부의 지배력을 강화해 나갔다.

호조 요시토키가 죽은 뒤 싯켄이 된 호조 야스토키는 싯켄을 보조하는 렌쇼의 직책을 설치하였다. 또, 도고쿠 지방의 유력 고케닌은 물론, 법을 잘 아는 정무 담당자를 참가시켜 효조슈를 구성, 합의에 입각해 정무와 재판에 임하게 하였다. 1232년에는 막부의 기본법전으로 ‘고세이바이 시키모쿠’가 제정되었다. 이는 이후 제정되는 무가법률의 본보기가 되었다.

<심화 학습>

1. 싯켄정치(執權政治)의 확립과정
2. 조큐(承久)의 난의 의의
3. ‘고세이바이(조에이) 시키모쿠(式目)’의 특색과 의의

<주요 인물 및 용어>

호조 야스토키(北條泰時; 1183~1242), 화여(和與),

지토우케(地頭請) : 이는 장원영주가 지토에게 장원의 관리를 맡기고 그 대신에 일정한 연공(年貢) 납입을 책임지우는 방법으로, 가마쿠라 중기 이후 두드러지게 행하여진 현상이다.

시타지추분(下地中分) : 장원의 시타지(下地; 土地)를 지토의 것과 장원영주의 것으로 양분해, 서로 토지와 농민을 완전 지배하고 상호간에 간섭하지 않기로 하는 형태로, 이를 ‘시타지추분’이라고 한다.




제14장 막부의 쇠퇴와 산업.문화의 발전

<시대 개관>

대제국을 건설한 몽고 황제 쿠빌라이는 두 차례에 걸쳐 일본 원정을 단행한다. 그렇지만, 몽고측은 압도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뜻하지 않았던 폭풍우로 큰 피해를 입고 철수한다. 이러한 몽고의 침공이 일본의 정치.사회 전반에 걸쳐서 끼친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고, 그 결과 가마쿠라 막부는 멸망으로 치닫게 된다.

한편, 가마쿠라시대는 산업이 발전한 시대였다. 우선 농업기술이 진보하고 토지 개간이 진전됨에 따라서 농업생산력이 현저하게 증대되었으며, 농업생산력이 상승함에 따라서 상업도 발달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시장의 발전이나, 장원 현지에서 바치는 세금인 연공을 동전으로 바치게 한 것 등은 모두 상업이 크게 발전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농업 및 상공업의 발달을 토대로 하여 일.송과 일.원 간에 대대적으로 무역이 이루어졌다. 일.송과 일.원 간의 무역은 단지 경제교류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종교.사상.문화.예술.학문 등 많은 분야에 걸쳐서 대륙의 선진사회의 새로운 문물이 도입되었던 것이다. 특히, 송나라로부터 새로이 선종이 들어와 일본인들의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송의 영향은 건축이나 조각 등의 조형미술에서도 나타나게 된다.

14.1 분에이노에키.고안노에키

14.1.1 몽고제국

대륙에서는 13세기가 되자, 북방의 강대국인 금(金)의 지배하에 있던 몽고족 중에서 칭기스칸이 출현해, 유목민들을 통일한 뒤 1206년에 몽고제국을 세웠다.

14.1.2 분에이.고안노에키의 전개

원나라는 일본을 정복하려는 생각으로, 1268년(文永 5) 이래 고려를 통해 일본에 세 차례에 걸쳐 사신을 파견해 조공을 바치고 복속할 것을 요구했다.

쿠빌라이는 고려를 일본 침공의 전진기지로 삼고 1274년(文永 11)에 약 3만명의 원.고려의 혼성군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원군은 대마도와 이키(壹岐)섬을 침공한 뒤 하카타(博多)만에 상륙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발생한 큰 바람에 의해 막대한 피해를 입고 철수하고 말았다. 이러한 원군의 제1차 침공을 일본에서는 ‘분에이노에키(文永の役)’라고 한다.

막부는 원군의 재침에 대비하여, 하카다만 연안에 상륙에 대비한 석벽(石壁)을 쌓는 한편, 수군(水軍)을 보강하였다. 또, 규슈의 고케닌(御家人)들을 동원하여 교대로 경비하게 하는 이른바 ‘이국경고번역(異國警固番役)’ 제도를 강화하였다.

쿠빌라이는 남송(南宋)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하자, 1281년(弘安 4) 약 14만 명의 병력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약 2개월에 걸친 공방전을 반복하던 중에 큰 폭풍우가 발생하여 원정군은 큰 손해를 입고 마침내 패퇴하고 마는데, 이러한 몽고군의 제2차 침공을 ‘고안노에키(弘安の役)’라고 한다.

14.1.3 고케닌 사회의 궁핍

한편, 막부는 그 이후에도 여전히 사이고쿠 지방의 방비를 강화하였으므로 ‘이국경고번역’에 참가해야 하는 고케닌들로서는 적지 않은 부담이 되었다. 몽고의 두 차례에 걸친 침공을 물리치기는 하였지만, 전공을 올린 고케닌들에게 은상(恩賞)으로 나누어 줄 수 있는 토지는 거의 없었고, 고케닌들도 전투비용을 지불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분할상속으로 고케닌의 소령(所領)은 세분화되었으며, 고케닌의 생활은 어려워질 뿐이었다. 그래서, 막부는 고케닌의 소령을 유지시키기 위해 여러 차례 소령을 매매하거나 저당 잡히는 것을 금지하였지만 고케닌의 궁핍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주지는 못하였다.

1297년(永仁 5), 막부는 덕정령(德政令)을 발포하여 고케닌이 저당 잡히거나 매매 등을 통하여 상실한 소령을 무상으로 돌려주게 하였으며, 고케닌에 관한 금전소송은 접수하지 않기로 하였는데, 이를 '에이닌(永仁)의 덕정령'이라 한다.

14.1.4. 시모쓰키 소동

호조 도키요리(北朝時賴)가 집권할 당시부터 막부 내부에서의 호조씨의 우위는 강화되고 있었지만, 원군이 침공할 무렵이 되자 호조씨 가운데서도 집안(家督)을 계승하는 도쿠소(得宗)에게 막부 권력이 집중되어 갔다.
그와 동시에, 도쿠소 가문의 가신(家臣)인 미우치비토(御內人)가 막부 내에서 큰 힘을 지니게 된다. 이런 미우치비토와 일반 고케닌 사이에 대립이 발생하고 몽고군의 침공 이후에는 무력충돌까지 일으키게 되는데, 이를 ‘시모쓰키(霜月) 소동’이라 한다.

14.1.5 악당의 활약

13세기 말부터 기나이(畿內) 지방 주변의 농촌에서는, 무사나 유력한 묘슈(名主)들이 농민을 거느리고 막부와 장원영주들에게 대하여 공공연하게 반항하는 현상이 일반적으로 전개되는데, 그들을 악당(惡黨)이라 불렀다. 악당은 장원의 연공미를 약탈하는 등 징수를 방해하고, 또 성을 세우거나 초소를 설치하였으며, 항만에 있는 창고를 습격하는 등, 지배체제를 혼란시켰다.
이 같은 고케닌사회의 동요 속에서, 막부의 정치가 도쿠소 전제정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은, 호조씨에 대한 고케닌 무사들의 불만과 불신을 격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여, ‘몽고의 일본 침공’ 이후 막부의 정치적인 위기는 더욱 심각해져 갔다.

14.2 산업의 발전

14.2.1 농업과 수공업의 발전

가마쿠라시대의 기본산업은 농업이었다. 당시 농민의 생활은 고통스러웠지만, 농업기술은 진보하였으며 농업생산력은 향상되었다.
농업을 하면서 부수적으로 행하여 왔던 수공업도 점차 발전하여, 장원 내에 거주하면서 전문적으로 수공업을 행하는 대장장이 등도 생겨나게 되었다.

14.2.2 상업의 발전

농업생산이 향상되자, 농민들이 사용하고 남은 생산물이 시장에 나와 상품으로 팔리게 되었다. 수공업자도 지위가 향상되고, 자신이 만든 제품을 상품으로 판매하기 시작하자 마침내 전국 각지에 시장이 출현하게 되었다.
원래 시장은 예전부터 수도(首都)에 설치되어 있었지만, 이 시대가 되면 장원의 중심이나 지방의 교통 요지, 사사(寺社)의 문전에서 크게 발달하게 된다.
또한, 이 시대가 되면 먼 지방과의 상품 판매가 활발해져, 항구도시나 요도가와(淀川) 등 하천 가에 있는 교통의 요지에 연공(年貢)으로 바치는 수확물을 보관.운송하거나 상품을 중계하거나 위탁 판매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도이마루(問丸)라고 하는 업자들이 출현하였다.
상공업자들 중에는, 좌(座)라는 동업조합을 만들어서 귀족이나 대사사 등을 혼조(本所)로 섬기고 좌역(座役)을 바침으로써 상품을 독점적으로 제조하고 판매하는 자도 생겨났다. 그리고, 일.송무역으로 많은 송나라 동전이 수입된 결과, 전국 각지에서 화폐가 사용되게 되었다.

14.2.3 일.송무역과 일.원무역

상공업의 발달과 관련하여 중요한 것이, 바로 이 시대에 성행하였던 일.송(日宋)무역과 일.원(日元)무역이다. 헤이시 정권에 이어서, 가마쿠라 막부도 송나라에 대하여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취하였다. 그러나 정식 외교관계는 열리지 않았고, 사무역(私貿易)의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무역의 중심이 된 항구는 지쿠젠(筑前) 지방의 하카타(博多)와 송나라의 명주(明州; 현재의 寧波)였다.
당시 양국간에 취급하였던 무역품으로, 일본은 금.수은.유황.마키에(蒔繪).도검(刀劍) 등이 수출되었고, 송나라로부터는 당물(唐物)이라고 불린 비단과 같은 직물, 도기(陶器).향료.약품.서적과 대량의 송전(宋錢)이 수입되었다.

14.3 가마쿠라시대의 문화

14.3.1 가마쿠라문화의 특색

가마쿠라시대의 문화는, 헤이안시대의 이른바 국풍(國風)문화의 전통과 신흥 무가(武家)사회를 배경으로 성립한 문화였다. 따라서, 가마쿠라문화의 특색으로 무엇보다도 먼저 문화의 이원성(二元性)을 지적할 수 있다. 즉, 종래의 공가(公家)문화에 대해 무가 자신들의 문화를 창조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이 시대가 공무(公武) 이원적인 성격의 사회였던 만큼, 문화면에 있어서도 그런 이원성이 강하게 남아 있었음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이런 가마쿠라문화가 이전의 문화와 다른 특색을 든다면,
첫째, 문화에 서민적(庶民的)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는 점이다.
둘째, 적극적인 무사의 기풍을 반영한 생동감 있고 실용적인 문화가 생겨났다는 점이다.
셋째, 송나라.원나라의 문화가 활발하게 도입되었다는 점이다.

14.3.2 가마쿠라 신불교의 출현

(1) 신불교 출현의 배경
헤이안시대의 섭관정치시대 때부터 사회불안이 증대되고, 말법도래사상이 사람들 사이에 침투하고, 특히 귀족계급을 중심으로 정토(淨土)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던 것이 가마쿠라시대에 들어오자 호겐(保元).헤이지(平治)의 난 이후에 계속 이어지는 난리, 무사계급의 진출을 축으로 하여 전개되는 정치적.사회적인 대변혁, 나아가서는 천재지변 등으로 인해 말법사상은 점점 더 사람들 사이에 퍼져 귀족은 물론. 무사.서민까지 똑같이 정신적인 구제를 기대하고 있었다.

(2) 호넨의 정토정

가마쿠라시대 종교 활동의 특징은 민중들의 구제에 있었다. 호넨(法然)은 처음에는 천태종(天台宗)을 배웠는데, 신분.성별과 현명함과 어리석음에 관계없이 오로지 아미타불을 믿고 ‘나무아미타불’이라고 염불을 외우기만 하면 어떤 사람이라도 구제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즉, 호넨은 나라.헤이안 불교가 귀족들을 위한 불교인 것을 비판하였는데, 이러한 호넨의 신불교를 정토종(淨土宗)이라 하였다.

(3) 신란의 정토진종

호넨의 제자인 신란(親鸞)은, 스승의 가름침을 더욱 철저히 관철하여 어떤 악인이라 할지라도 아미타불을 믿는 마음을 지니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왕생할 수 있다고 하는 악인정기설(惡人正機說)을 주장하였는데, 신란의 이러한 새로운 불교를 정토진종(淨土眞宗)이라고 한다. 신란의 가르침은 이후 무로마치 중기에 렌뇨(蓮如)에 의해 보급되어 갔다.

(4) 잇펜의 시종

잇펜(一遍)은, 사람은 모두 신앙심의 유무, 정(淨).부정(不淨)을 불문하고 염불로 인해 구제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전국을 떠돌아다녔다. 잇펜과 그의 제자들은 춤추며 염불을 외는 오도리넨부쓰(踊念佛)를 전파하였는데, 그의 가르침을 시종(時宗)이라고 한다.

(5) 니치렌의 일련종

니치렌(日連)은 석가의 참된 가르침은 『법화경(法華經)』에 있으며, 「나무묘법연화경」이라고 염불을 외는 것만으로 남녀 귀천의 차별 없이 성불(成佛)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막부가 다른 종파를 금지하고 법화경만을 신봉할 것을 요구했다. 그래야지만 국토나 민중들이 번영할 것이라는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을 막부에 제출했다. 니치렌은 법화신앙에 입각하여 다른 종파를 철저하게 비판했는데, 그 결과 막부나 여러 종파들의 박해를 받게 되었다. 이를 일련종(日連宗; 일명 法華宗)이라고 한다.

(6) 에이사이의 임제종과 도겐의 조동종

에이사이(榮西)와 도겐(道元)은 선종의 일파인 임제종(臨濟宗)과 조동종(曺洞宗)을 송나라로부터 배워 전하였다. 계율과 좌선을 통한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수행함으로써 깨우쳐야 한다는 선의 가르침은 무사들 사이에 크게 번졌다.
특히 에이사이는 교토에 건인사(建仁寺), 가마쿠라에 수복사(壽福寺)를 세우고 임제종을 열었다. 에이사이는 『흥선호국론(興禪護國論)』을 저술하여 선(禪)을 통한 호국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7) 신불교의 공통점

신불교(新佛敎)의 공통점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첫째, 남도(南都; 奈良).헤이안(京都)의 불교가 귀족적인 경향을 띤 것에 대한 반발로 생겨났다.
둘째, 귀족들만이 할 수 있었던 불경의 연구나 사원에 대한 기진(奇進) 등의 행동이 왕생이나 성불하기 위한 필수조건이 아니라고 하였다.
셋째, 무사.농민.상공인.여성도 출가(出家)하지 않고 일상적인 생활을 하면서도 왕생과 성불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넷째, 이를 위해서는 오로지 하나만 열심히 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14.3.3 학문의 새로운 경향

(1) 고전에 대한 연구

율령제도에 규정되어 있던 대학(大學).국학(國學)은 이 시대가 되면 쇠퇴하고, 공가의 학문은 집안의 학문으로서(家學) 전문가가 세습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공가들 사이에는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 등의 고전의 연구나 조정의 의식(儀式)을 연구하는 학문이 발달하였다.
무사들은 무예만 아니라 와카와 서예 등을 교양으로 배우면서 귀족문화를 받아들여 갔다. 제3대 쇼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源實朝)는 『만엽집(万葉集)』 풍의 강하고 개성이 풍부한 노래를 지었다.
산문으로는 많은 설화집(說話集)이나 수필집과 기행문 등이 귀족이나 승려의 손으로 쓰여졌다.
승려 지엔(慈圓)은 『구간쇼(愚管抄)』를 저술하였는데, 그는 조정이나 불교세력의 쇠퇴와 무사세력의 진출을 필연적인 것이라 하였다.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는 귀족사회를 쇠퇴시킨 고대 말기의 내란, 즉 겐페이 갓센을 주제로 한 군기물로, 무상관(無常觀)을 기조로 하는 이 작품은, 비파법사(琵琶法師)에 의해 사람들에게 널리 전파되어 갔다.

(2) 무사의 학문

당시 교육기관의 역할을 하고 있던 사원에서 무사의 자제들이 교유을 받는 풍습이 점차로 퍼져 갔다.

(3) 송학의 전래

남송(南宋)의 주희(朱熹; 1130~1200)가 대성한 송학(宋學)은 주자학(朱子學)이라고도 불려졌는데, 당시 선승(禪僧)들이 이를 빈번하게 도입했다.

14.3.4. 가마쿠라 미술

(1) 건축

건축양식으로서는 당시까지의 와요(和樣)와는 달리, 가마쿠라시대에 들어와서 천축양(天竺樣)과 당양(唐樣)으로 불리는 양식이 송나라로부터 전래되었다.천축양은 규모가 큰 건축에 적당한 것으로, 도다이지의 남대문(南大門) 등이 현재 남아 있다.
당양은 선종양(禪宗樣)으로도 불려졌는데, 가마쿠라에 있는 엔가쿠지(圓覺寺)의 사리전(舍利殿)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대표적인 건물이다.

(2) 조각

이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로서 운케이(運慶)와 그의 제자 가이케이(快慶) 등이 있는데, 그들은 사실 묘사와 강건함이 뛰어나고 인간미가 넘치며 동적인 작품을 남겨, 당시의 시대 정신을 잘 반영하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서, 도다이지의 남대문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 운케이와 가이케이의 합작) 등이 있다.

(3) 회화

가마쿠라시대 회화는 주로 야마토에(大和繪)로, 정토신앙의 영향을 받아서 전대에 이어 아미타내영도(阿彌陀來迎圖)나 불경의 내용을 민중들에게 알기 쉽게 해설하기 위한 극락도나 지옥도가 그려졌다.
두루마리 형태의 그림인 에마키모노(繪卷物)도 점점 성행하게 되었다. 「헤이지모노가타리에마키(平治物語繪券)」.「모코슈라이에고토바(蒙古襲來繪詞)」 등은 무사나 전란을 주제로 한 것으로 이 시대에 어울리는 작품이다.


< 요 약>

두 차례에 걸친 몽고의 일본 원정(분에이노에키.고안노에키)을 물리치긴 했지만, 몽고의 침입은 막부 붕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전공을 올린 고케닌들에게 은상으로 나누어 줄 만한 토지는 거의 없었고, 고케닌의 소령은 세분화되어 가고 있었으며, 화폐 경제의 발달로 인한 지출도 증가하여 고케닌의 생활은 빈궁해져 갔다. 이에 대해 막부는 고케닌이 저당 잡히거나 매매 등을 통해 상실한 소령을 무상으로 되돌려 받는 덕정령을 발포했지만, 이는 오히려 경제계를 혼란시켰으며, 결과적으로 고케닌들은 경제적인 어려움에 더욱 허덕이게 되었다.

한편 몽고군의 침공 시기를 전후하여, 호조씨 가운데서도 그 적자(嫡子)인 도쿠소(得宗)에게 막부 권력이 집중되어 갔으며, 이러한 도쿠소 정권의 전제화 경향은 1285년의 시모쓰키(霜月) 소동 이후 한층 강화되었다. 호조씨의 전제화 경향에 대해 소령을 몰수당한 고케닌들의 반감도 커져 호조씨는 고립되어 갔다. 막부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비고케닌 무사들의 막부정치에 대한 비판은 격렬해졌으며, 귀족.사사 등의 장원영주들도 막부에 반대하는 자세를 공공연하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또, 13세기 말부터 기나이 지방을 중심으로 악당이 출현하는 등 가마쿠라 통치력은 점점 쇠퇴해 갔다.

<심화 학습>

총령제(총領制)의 변질과 슈고 다이묘(守護大名)
총령제란 가마쿠라 고케닌 사회의 토대가 되었던 것으로, 부모의 유산인 영지(領地)를 소료(총領)와 서자(庶子)들이 분할상속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고케닌의 소령(所領)을 세분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여 경제변동에 대한 저항력을 약화시켰다.
그래서 가마쿠라시대 중기가 되면, 이 고케닌 무사들이 더 이상 약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분할상속을 금지하고 적자(嫡子)가 모든 영지를 상속하고, 서자는 적자에게 종속되는 단독상속(單獨相續)이 행하여지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까지 일족 내부에 분립되어 있던 소료 집안(本家)과 서자 집안(分家)의 관계도 서로 독립적인 것으로 변화해, 총령제는 해체되고 무사사회는 혈연보다 지연적인 결합이 더 큰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주요 인물 및 용어>

호조 도키무네(北條時宗; 1251~1284), 말법사상(末法思想), 호조키(方丈記), 쓰레즈레구사(徒然草)





제15장 겐무 신정과 남북조의 내란

<시대 개관>

조큐(承久)의 난에서 패배한 이후, 교토의 조정은 완전히 기력을 상실해 버렸다. 원정은 형태만 남아 있을 뿐, 천황가는 지명원(持明院) 계통과 대각사(大覺寺) 계통이라고 하는 두 개의 파로 나뉘어, 서로 막부에 의지하면서 왕위를 다투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호조 다카토키(北條高時)가 싯켄이 된 이후, 막부의 정치는 고케닌들의 신뢰를 잃어버리게 되고, 세상의 여론은 반막부적으로 변해 갔다. 이런 가운데에 즉위한 대각사 계통의 고다이고 천황은, 막부를 타도하고 조정이 정권을 다시 장악하려고 시도해 성공한다.

고다이고 천황의 정치를 '겐무 신정(新政)'이라고 한다. 겐무 신정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복고정치로, 무사들을 예전의 귀족인 공가의 지배하에 둔다고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당시의 무사들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겐무 신정에 실망한 무사들은,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를 중심으로 해서 신정부의 타도에 나서게 되는 것이다. 교토를 둘러싼 여러 차례의 공방전 끝에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추대한 지명원 계통의 천황은 교토에, 그리고 대각사 계통의 고다이고 천황을 중심으로 한 세력은 교토의 남쪽인 요시노(吉野) 산 속에 각각 조정을 두고, 이후 60년간에 걸친 오랜 항쟁을 거듭하였으므로, 이를 남북조의 내란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내란은 1392년에 제3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에 의해 끝나게 된다.



15.1 가마쿠라 막부의 멸망

15.1.1 지명원통과 대각사통

조큐(承久)의 난 이후, 조정의 정권을 대표하는 원정(院政)의 힘이 쇠약해지자, 왕위계승에도 막부가 간섭하게 된다. 가마쿠라시대 중기, 고사가(後嵯峨) 천황이 양위한 후에 왕통은 고후카쿠사(後深草) 천황으로 시작되는 지명원통(持明院統)과, 가메야마(龜山) 천황으로 시작되는 대각사통(大覺寺統)의 양통으로 나누어져, 양쪽 다 자신들이 정통임을 주장하며 다투게 된다.

15.1.2 고다이고 천황의 친정

대각사통의 고다이고(後醍醐) 천황이 즉위하자, 그는 과거 천황과 귀족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시대를 이상적인 시대로 생각하고 조정의 정치를 쇄신하고자 하였다.

15.1.3 반막부세력의 거병

막부가 붕괴되는 과정에서 빠Em릴 수 없는 것이 있는데, 당시에 ‘악당’으로 불리었으며 현재는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충신의 대명사와 같은 존재로 생각되어지고 있는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이다. 당시 천황은 섬으로 유배되었지만, 각지에서는 막부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군대를 일으켰다. 호조씨에 반감을 품은 각지의 유력한 무사들이나, 장원영주에게 대항하여 악당이라 불리던 기나이 지방 일대의 무사세력들도 천황과 모리요시(護良) 왕자의 호소에 응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와치(河內) 지방의 구스노키 마사시게는 1336년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군대와 싸워 전사하는데, 그는 일본 역사상 충신을 대표하는 존재로, 그의 동상이 현재 천황이 살고 있는 에도(江戶)성 앞의 광장에 세워져 있다.

15.1.4 막부의 멸망

이러한 정세 속에서, 1333년(元弘 3) 윤2월, 천황은 유배지인 섬에서 탈출했다. 그 무렵, 구스노키 마사시게를 위시한 여러 무사들은 막부의 대군을 맞이해서 잘 싸우고 있었다.
한편, 간토 지방의 호족이면서 유력한 고케닌이었던 닛타 요시사다(新田義貞)가 막부 타도를 외치며 군대를 일으켜 가마쿠라를 공격한다. 이 때 막부의 유력한 슈고인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高氏; 뒷날 尊氏로 개명함)는 자신의 아들을 이 가마쿠라 공격에 참가시킨다.
이로써, 가마쿠라 막부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가마쿠라 막부를 창건한 이래 140여년의 세월이 지난 1333년에 멸망하게 된다.

15.2 겐무 신정

15.2.1 정치기구의 정비

고다이고 천황은 호조씨가 멸망하자 곧 교토로 돌아와서, 우선 지명원통의 고곤(光嚴) 천황을 폐위시키고 섭정.관백을 폐하며, 막부와 원정을 부정하고 천황 친정을 시작하였다.
신정(新政)이 시작된 다음 해에 ‘겐무(建武)’라고 연호를 바꾸었기 때문에, 이러한 여러 가지 새로운 정책이 시행된 정치를 ‘겐무 신정(建武新政)’이라고 한다.

15.2.2 공무의 반목

겐무 신정의 내부는, 막부 타도에 큰 공을 세운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모리요시 왕자가 대립하게 되자 공가(公家)와 무가(武家)의 반목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15.2.3 논공행상의 파탄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한 이후, 공을 세운 무사들의 겐무 신정에 대한 불만은 커져만 갔다.
게다가 사사나 공가들에 대한 은상(恩賞)은 후하였던 반면에, 상대적으로 무사들에 대하여는 소홀하였다.

15.3 남북조의 내란

15.3.1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거병

겐무 신정에 반발하던 무사들의 무가정권을 재흥시키고자 한 것이 바로 아시카가 다카우지였다.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겐무 신정에 불평을 하고 있던 무사의 인심을 얻은 후, 겐무 신정에 대하여 반기를 들었다.
신정부는 3년여 만에 붕괴되고 만다. 하지만, 고다이고 천황은 이같은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움직임에 굴하지 않고, 1336년 말에 요시노 지방으로 도망쳐 왕위의 정통성을 주장했다. 이로써 조정은 요시노(南朝)와 교토(北朝)로 나뉘어져 서로 다른 연호를 사용하고, 또 지방의 무사들도 두 세력으로 나뉘어 이후 60년에 걸쳐서 싸우게 된다. 하지만, 1339년에 요시노에 있던 행궁에서 고다이고 천황이 병으로 사망하게 되자, 남조의 세력은 급속히 쇠퇴했다.

15.3.2 막부의 내분

한편, 북조측도 아시카가씨 일족이나 주종관계에 있는 무사들 사이에 계속하여 분쟁이 발생하고 있었다. 1350년(觀應 1), 막부의 내부는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동생인 아시카가 다다요시와,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집사인 고노 모로나오(高師直)가 대립해, 지방의 슈고나 중앙의 관료들까지도 이에 휘말리게 된다. 그 결과 막부는 분열되어 전국 각지에서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아시카가 다다요시가 이끄는 양군이 싸우는 전란이 장기간 계속되었다.
1352년(觀應 3)에 아시카가 다다요시가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독살당해 전란은 한 고비를 넘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막부의 내분을 ‘간노노조란(觀應の櫌亂)‘이라고 한다. 이처럼, 남조측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내란은 종식되지 않고 더욱 복잡해져 갔던 것이다.

15.3.3 장기화.전국화의 배경

남북조의 내란이 장기화하고 전국적으로 번진 배경에는, 단순히 중앙의 정치세력이 양분되었다는 것 외에, 사회 저변에 지방 무사층의 동향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는 보다 깊은 이유가 있었다.

15.4 남북조의 합체

15.4.1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등장

1368년(應安 1), 나이 어린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가 쇼군이 되었다. 이 무렵, 기나이 지방에서 남조측의 쇠퇴는 결정적인 것이었고, 또 규슈에서는 규슈탄다이(九州探題)로 임명되어 현지에 부임한 이마가와 료순[今川了俊; 사다요(貞世)라고도 한다]이 남조측의 부대를 격파하자, 막부는 전국을 거의 다 군사적으로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아시카가 정권은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손자인 아시카가 요시미쓰 때에 이르러 겨우 안정되었다.

15.4.2 남북 양조의 합일

1392년((明德 3),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남조측에 화해할 것을 청했다. 남조의 천황은 이 신청을 받아들여, 천황의 상징인 3종의 신기(神器)를 북조의 천황에게 양도했다. 이리하여 양조의 합체(合體)가 이루어져, 약 60년 동안에 걸친 내란은 마침내 막을 내렸다.


<요 약>

막부가 쇠퇴의 기미를 보이자, 고다이고 천황은 반막부의 군사행동을 개시하였다. 막부는 교토에 대군을 보내서 이 움직임을 저지하려고 했으나, 아시카가 다카우지 등과 같은 유력 고케닌들이 막부에 등을 돌리면서 전세는 천황측으로 기울어져 갔다. 교토의 로쿠하라탄다이, 가마쿠라가 차례로 반막부군에 점령되어, 1333년 가마쿠라 막부는 멸망했다.

이듬해 고다이고 천황은 연호를 겐무라 하고, 천황을 중심으로 한 정치를 개시했다. 이를 ‘겐무 신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신정은 무사의 이해관계를 반영하지 못하였던 까닭에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중심으로 한 무가세력은 조정에 반기를 들었으며, 결국 싡ㅇ은 2년 만에 무너지게 되었다. 고다이고 천황은 요시노에서 독자적인 조정을 구성하였으며, 전국의 무사는 요시노의 남조, 교토의 북조에 붙어 영지 쟁탈전을 벌였다. 이를 남북조의 내란이라고 한다.
한편,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북조로부터 정이대장군에 임명되어 막부를 열고, 슈고에 군사.경찰권과 장원 연공의 절반을 수취할 수 있는 권리(半濟)를 주는 등 그 권력을 강화하여, 전국의 무사를 결집시키려고 했다. 제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에 이르러 남조세력의 동의에 따라 60년에 걸친 남북조의 전란은 종결하게 되었다.

<주요 인물 및 용어>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 1305~1358),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 1294~1336

출처 : 천마(天馬)를 탄 왕자님!?
글쓴이 : 까오 야 ♥ 자 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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