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고전이야기

[스크랩] <일본미술>

쫄개 2008. 1. 7. 07:59
<일본미술>

여러 가지 요인들이 일본 미술의 발전에 기여했다. 기법과 미학적으로 일본 미술은 수세기에 걸쳐 중국의 영향을 받아왔으며 이들 중 일부는 한국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최근에는 서구의 기법과 예술적 가치에도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러나, 다른 문화와 동화된 사고와 기법에서도 일본인의 독자적인 취향이 고유한 방법으로 표현되어 왔다.


고대의 미술

일본 최초의 토착민인 조몬족 (繩文族)(BC 10,000∼BC 300년)은 ‘도구’라고 불리는 진흙 입상을 만들었는데, 그 중 대부분이 여자의 모습을 빚은 것이었다. 기원 초에 그 기원이 다른 야요이족(彌生族)(BC 300∼AD 300년)들은 구리무기와 청동 종(鍾), 가마에서 구운 도자기 등을 만들었다. 야요이 시대 이후인 고훈시대 (古墳時代 AD 300∼AD 710년)의 공예품으로는 청동 거울과 무덤의 가장자리를 장식하는 ‘하니와’(埴輪)라는 진흙원주가 있다. 야요이 시대의 도타쿠(銅鐸-종) 위에 새겨진 단순한 모양의 막대상과 코훈시대의 무덤내벽을 장식한 벽화는 일본회화의 기원이 되었다.



불교와 중국의 영향

회화는 통치계급이 중국과 한국으로부터 전래된 불교문화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16세기에 번성했다.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초반의 회화들은 중국의 6왕조시대(222∼589년)에 발달하였던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그것들은 대부분 부처의 일생이나 여러 불교신들을 묘사하고 있다.
10세기 이후에 회화는 점차적으로 조도 신코(淨土信仰-정토 불교)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집권 계층의 추진으로 16세기후반과 17세기 초반에 걸쳐 사찰과 수도원의 혼합적인 건물이 각지에 세워졌는데, 주목할 만한 곳으로 ‘아스카테라’(飛鳥寺), ‘시텐노지’(四天王寺), ’호류지’(法隆寺)등이 있다. 이러한 사찰에는 특히 본당과 예배당이 매우 화려하며 많은 불교 예술품이 만들어졌다. 호류지의 콘도 (金堂-금당)에 있는 벽화는 이 시기의 중요한 그림중 하나이다. 호류지에는 여러 부처와 보살, 수호신의 조각품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은 호류지에 보존되어있는 삼존불상이다.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794∼1185년)중반에는 ‘야마토에’(大和繪)라고 불리는 매우 독특한 양식이 중국풍의 회화양식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야마토에’는 교토 근교의 경치를 묘사했으며, 초기 작품들은 주로 병풍과 미닫이문에 그려졌다.
이러한 경향에 따라 그림책과 부채에 삽화를 그린 ‘에마키’(繪卷)가 회화의 두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겐지 이야기’(源氏物語 1130년에 출간)는 에마키 그림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12세기 후반에는 무사계급으로 권력의 중심이 옮겨졌으나,여전히 귀족계급은 절과 신사의 운영자로서 부를 축적하고 다양한 예술 장르의 후원자로 남아있었다.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 1185∼1333년)에는 무사계급의 기호에 맞는 사실주의와 귀족 계급의 미술적취향에 어울리는 보수주의가 2대 주류를 이루었다.
사실주의는 조각에 있어서 가장 뚜렷한 특징이었다. ‘케이’학교(사실주의 조각)에서 가장 유명한 조각가였던 ‘운케이’의 작품 중에는 ‘도다이지’(東大寺)의 문에 새겨진 2개의 인왕신 조각상과 2명의 인도현인 조각상, 고후쿠지(興福寺)의 ‘무차쿠’와 ‘세신’ 등이 있다.
13세기에 유행하였던 선종은 다른 종파의 것과는 매우 상이한 건축과 미술작품을 소개했다.
14세기에는 두루마리화(畵)가 쇠퇴하고 ‘가마쿠라’와 ‘교토’의 유명한 선종 수도원에서 유래된 수묵화가 등장하였다. 선종 화가들과 그 후원자들은 중국의 ‘성’(960∼1279년)과 ‘유안’(1279∼1368년)이 창시한 수묵 담채화를 선호했다. 1400년대 말엽에 선종 화가들과 교토의 후원자들은 ‘수이보쿠가’(水墨畵)라고 불리는 수묵풍경화를 발전시켰다. 선종 화가들 중 ‘셋슈’는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 중국회화를 공부하였다. 카노학교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인물은 카노 에이토쿠이다. 카노 학교는 그 영향력을 계속 확장하여 가마쿠라 막부의 회화학원으로서의 입지를 확립하였다. 에도 시대의 중반에 활약한 ‘오가타 코린’은 ‘카노’의 화가로 재치 있는 구도와 귀족적인 구성으로 유명하다.



에도 시대(江戶時代 1600∼1868년)

도쿠가와 막부(德川 幕府)는 1600년에 집권하여 일본의 경제적, 정치적인 안정과 평화를 확립하면서 계승되었다. 에도(江戶-동경)와 교토의 상인들은 막부정권 아래에서 부를 축적하여 점차 문화활동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간에이(寬永 1624∼644년)라고 불리는 이 시기의 회화들은 교토의 가모가와(鴨川) 강변의 유흥가에 모인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묘사하였다.
‘오사카’와 ‘에도’에는 이와 비슷한 지역이 있었는데, 이곳의 우키요(浮世-세속)라고 불리는 세속적인 생활방식은 ‘우키요에’(浮世繪-세속적인 풍속화)라는 예술 장르로 승화되었다.
이러한 ‘우키요에’는 매춘굴과 가부키(歌舞伎) 극장을 주로 묘사했으며 전국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18세기 초반까지 회화형식으로 제작된 ‘우키요에’는 대부분이 목판화였다.
처음으로 출판된 ‘우키요에’는 ‘슌가’(春畵)라고 불리는 성 지침서(외설적인 사진)였는데, 이러한 책과 그림 집들은 매우 노골적으로 정사(情事) 장면을 표현했다. ‘슌가’ 중에는 주석이 달린 그림책도 있었는데, 주로 머리를 감는 매춘부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러한 장면에서 주로 초점이 되는 것은 매춘부들의 자세와 기모노를 걸친 모습 등이었다.
후반기에 이르자 ‘우키요에’의 중심 활동은 교토 - 오사카 지역에서 에도 지역으로 옮겨갔으며, 이곳에서는 가부키 배우들의 초상화가 일반적인 주제가 되었다. 일반 서민들도 미인을 그린 ‘우키요에’에 큰 관심을 나타냈다. 18세기 후반까지 ‘우키요에’는 황금기를 누렸다. 토리 기요나가의 작품에 나타난 키가 크고 우아한 여성의 아름다움은 1780년대 주요 테마였다. 1790년 이후에는 오늘날 유명해진 여러 화가들-기타가와 우타마로, 토스사이 사라쿠, 가츠시카 호쿠사이, 안도 히로시게, 우타가와 구니요시-에 의해서 새로운 형식이 도입되어 급속히 전파되었다. 유럽의 훌륭한 화가들을 포함한 19세기 후반의 여러 서구화가들에게 ‘ 우키요에’는 외국의 미술형태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에드가드가’와 ‘빈센트 반 고호’ 등의 화가들은 ‘우키요에’의 구도 양식과 원근화법, 그리고 색채의 사용법 등을 이용했다. 또한 이들은 서구 미술에서는 거의 볼 수 없었던 자연을 주제로 사용하여 화가들의 주제에 대한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프랑스의 화가이자 유리 세공가였던 에밀갈레는 ‘호쿠사이’의 물고기 스케치를 꽃병장식에 사용했다. 메이지 시대 (明治時代 1868∼1912년)의 도래와 정부의 서구화 정책에 따라 주제와 생명력으로 대중과 가까웠던 ‘우키요에’는 급속히 쇠퇴했다.
한편, 에도시대 말엽에는 유럽미술의 영향을 받은 화가 수가 증가하였다. 마루야마 오쿄, 마츠무라 고슌, 이토 자쿠츠와 같은 주요 화가들은 일본과 중국, 서구 형식의 특징들을 모두 받아들였다.



현대의 미술

일본 문화는 메이지 시대에 눈부신 발전을 했는데 이시기는 정부가 서구의 기술과 관념에 대해 연구하고 적당한 요소를 국가적 장점으로 채택하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현대화 작업의 과정 동안 서구형식의 회화들은 정부의 후원을 받았으며, 많은 화가들이 국비로 해외유학을 떠났다. 전통적 일본회화와 새로운 서구회화간의 경쟁이 끝나고, 타이쇼 시대(大正時代 1912∼1926년)에 이르자 미술에 있어서 서구적 요소들이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우메하라 류자부로’와 ‘야스이 소타로’ 같은 화가들이 ‘폴 세잔’ 과 ‘피에르 어거스트 르느와르’, ‘카밀레 피사로’ 등의 기법을 공부하고 보급시켰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전 기간 ‘야스이’와 ‘우메하라’는 일본에서 서구 형식의 회화적 특성들을 대부분 몰아냈다. 우메하라는 그 작품의 여러 요소들을 일본 형식의 회화에 도입하고 일본의 다른서양화가들이 좀더 독창적인 해석력을 가지도록 일본적 요소를 서구형식에 도입하기도 하였다. 일본 회화의 현대화는 ‘야스다 유키히코’와 ‘고바야시 고케이’의 지도 아래 진행되었다.
다른 여러 화가들은 대중적인 주제를 채택하고 잦은 전시회를 가짐으로서 일본스타일의 회화에 대한 관심을 모으고자 노력했다.
해외로 유학을 떠났던 화가들이 일본으로 돌아왔던 20세기 초반에 서구 스타일의 조각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대표적인 조각가로는 ‘어거스트 로댕’의 기법을 도입하여 일본 조각의 현대화에 선구자 역할을 하였던 ‘오기와라 모리에’가 있다. 또 다른 영향력 있는 조각가로는 뛰어난 시인으로서 예술에 대한 로댕의 견해를 번역했던 ‘다카무라 고타로’가 있다.
2차 세계대전 후 일본에는 팝 음악, 추상예술, 미니멀 아트, 동태예술 등의 서구문화사조가 급속히 확산되었는데, 일본미술은 그 와중에서도 그들 나름의 독창성을 되찾기 시작했다.
다른 문화를 전통적으로 수용한 일본 화가들은 세계 미술시장에 독창적인 작품을 내놓고 있는데 대표적인 화가 두 명으로는, 1953년 상파울로 비엔날레와 1954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작품을 출품하였으며, 1970년에 오사카에서 개최된 국제박람회의 상징인‘타이요 노 토’(太陽の塔 - 태양의 탑)를 디자인했던 ‘오카모토 타로’ 와 에로티시즘과 아이러니로 가득 차있는 작품으로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이케다 마스오’가 있다. 이케다는 또한, 1966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회화부문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덧붙여 ‘히라야마 이쿠오’는 환상적인 실크로드의 풍경을 묘사한 그림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 어린이를 위한 그림을 주로 그렸던 ‘이와사키 치히로’는 아이들의 초상화로 호평을 받았다. 그녀의 그림 중 대부분은 화집에 그려졌으며 이러한 화집은 10개 이상의 나라에서 출간되었다.

출처:주대한민국일본국대사관
출처 : 천마(天馬)를 탄 왕자님!?
글쓴이 : 까오 야 ♥ 자 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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